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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 <와일드>-누구나 한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번은 길을 만든다
유서영 칼럼니스트  |  yoo666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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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05  15: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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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 <와일드>

-누구나 한번은 길을 잃고, 누구나 한번은 길을 만든다

   
▲ 영화 <와일드> 포스터.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아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아,

그게 진실하다는 걸 알기에-

사람들이 임종 때의 경련을 흉내 낼 수 없고,

임종의 고통을 모방할 수 없기에-

한 번 멍해진 눈들을-그러면 그것은 죽음인데-

거짓으로 흉내 낼 수는 없으며,

누추한 고뇌가 꿰어 놓은

이마 위의 구슬방울들을 거짓으로 흉내 낼 수는 없기에

 

-에밀리 디킨슨, 시집《디킨슨 시선》 中

 

[디아티스트매거진=유서영] 타인의 고통은 생각보다 쉽게 마주할 수 있다. 비단 뉴스만 보더라도 각기의 상처들이 적나라하게 송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고통은 예상 외로 마주하기 힘든 시선에 서있다. 남의 상처는 왈가불가해도 내 상처는 무엇이 원인인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어떻게 치료해야할 지 판단하기가 힘들다. 애당초 고통을 망각할 때도 많다. 긍정이 덮어버린 상처엔 고름만 찰뿐이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진실한 걸 안다는 디킨슨의 시도 나의 고통 앞엔 무색하다. 거울을 한참 들여 봐도 보기 힘든 게 나의 고통스러운 표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영화 <와일드>는 잊고 살았던 나의 고통에 감각을 일깨우는 법을 알려주는 영화다.

 

나를 잃은 26살짜리 고아

로드무비라 함은 본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속 시한부 남자들, <델마와 루이스> 속 천방지축 여자들, <파리, 텍사스>의 애잔한 부자처럼 짝꿍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와일드> 속 셰릴에겐 짝꿍 따윈 없다. 혼자가 되기 위해 시작한 트레킹이다. 친구라곤 몸 채만한 배낭이 전부다. 4000km가 넘는 길, 9개의 산맥과 자신을 넘어야만 걸음을 멈출 수 있다. 고작 26살의 셰릴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무모한 여행을 시작하게 된 걸까.

   
▲ 행복했던 셰릴과 엄마 바비.

22살 이전의 미셸은 문학을 배우는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6살 때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를 떠나온 이후로 가난하지만 따듯하게 엄마와 동생과 살았다. 엄마는 자신의 삶에 토를 달지 않을 만큼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 네가 마음만 먹으면 매일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어.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어.” 투정하는 셰릴에게 엄마 바비는 늘 이렇게 말했다. 또 딸이 다니는 대학에서 만학도의 길을 걸을 만큼 학구열도 대단했다. 제임스 미치너를 좋아하고, 에리카 종의 작품을 딸과 토론하는 일상이 엄마 바비는 너무나 행복했다. 셰릴 역시 그랬다. 가끔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는 행실을 일삼지만, 누구보다 엄마의 딸임에 행복해했다. 그러던 중 엄마 바비는 고작 45살이 되던 해 암에 걸린다. 1년을 산다던 바비는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아내와 엄마로서가 아닌 바비, 본연의 자신으로 살아 보기도 전에 말이다. 셰릴은 아끼던 말을 부탁한다는 엄마의 유언을 들어주지 못한다. 안락사 시킬 돈이 없기에 총으로 말을 쏴죽일 수밖에 없다. 그 때부터였다. 남편을 두고도 외도를 일삼고, 마약에 취해 살기 시작한 건 엄마를 상실한 후였다.

 

상실의 갈림길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상실한 이를 대신할 대상을 찾아 다시 삶을 살아가는 애도의 길과 자기 자신까지 상실해버리는 우울증의 길. 셰릴은 거침없이 우울증의 길을 걷는다. 거릴 것 없이 자신을 망가뜨린다. 아무에게도 다시는 의지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고, 남편 폴에게 마저 등을 돌린다. 셰릴은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고 의지한 탓에 한순간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믿지 않으리. 그렇게 셰릴은 상실의 길에서 자기 자신까지 벗어 던진다. 간신히 남아있는 자아는 자기 몸속에 책임져야 할 아이가 생겼을 때, 다시 깨어난다. 임신테스트기를 사러갔던 곳에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 1권>을 발견하며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몸 안에 아이를 죽였듯, 셰릴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 엄마를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난다.

   
▲ 몸채만한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나는 셰릴.

여정과 문장들

죽은 엄마와 자신을 사망신고하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셰릴은 차분히 자신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유년시절 아빠의 폭력부터 엄마가 죽은 후 마약에 빠져 살던 시절, 낙태를 선택하고 이혼을 하게 된 근래의 상처들까지. 극한의 상황에서 마주한 상처들을 되새기는 과정에서 셰릴은 죽은 엄마를 인정하고, 이전의 자신을 지우는데 성공한다. 구간을 지날 때마다 셰릴이 방명록에 써놓는 문장들은 단순히 명사들의 문장이 아닌 셰릴 스트레이드 본연의 문장으로 거듭난다.

“몸이 그댈 거부하면 몸을 초월하라”_에밀리 디킨슨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내 모습 그대로 받아줄래요?”_조니 미첼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하나 내겐 지켜야 할 약속과 잠들기 전 가야 할 길이 있다”_로버트 프로스트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예상한 일에도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하다”_제임스 미치너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내게 머물 곳이 없다면 꼭 만들어 보이리라”_플래너리 오코너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줘요.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인생으로 무엇을 할 작정인가요?”_메리 올리버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나는 발걸음이 느립니다. 그렇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_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_윈스턴 처칠 그리고 셰릴 스트레이드

   
▲ PCT 중 극한의 상황에서 하늘을 보는 셰릴의 모습.

두 켤레의 신발

영화의 오프닝은 셰릴이 깨진 발톱을 뜯어버리는 씬으로 시작한다. fuck이라고 외치며 신발을 던져버리는 셰릴의 모습은 난감하고 처량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수많은 길을 걸어 다시 셰릴이 오프닝 때의 행위를 반복할 때, 그 모습은 처량하기 보단 당차다. 이미 많은 걸 버리고 온 길이기에 신발 하나 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셰릴도 관객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걸으면 새 신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 신발은 자신을 아프게 하는 딱 맞는 사이즈의 신발이 아닌, 조금은 넉넉하고 여유 있는 신발이다. “평범한 발을 가진 아이조차 새 신발이 생기면 세상과 사랑에 빠진다”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글처럼 그녀는 세상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는 새 신발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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