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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동주> 그리고 몽규
김혁준 칼럼니스트  |  hj072378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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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03  21: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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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김혁준] 윤동주 그리고 그와 인생을 함께한 동갑내기 사촌이자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탄생 100주년. 백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여전히 부끄럽지 않고 떳떳이 살고 있는가. 그들이 바꾸고자 한 것들은 과연 바뀌었으며 우리는 비겁하지 않게 고통스러운가. 위안부 합의 무효화 시위를 한 대학생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검찰에 대해 여실히 무력함을 느끼며 역사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예술작품을 보고 감정을 변기 물 내리듯이 영화관에 쏟아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것들에 치여살며 바쁘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영화 <동주>가 개봉하고 일년이 지난 지금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며 슬퍼한 뒤 행동으로 옮긴 우리네들이 있는가. 우리는 시인 김수영이 말한 '언어 이전의 고통'이 있는가? 이 글은 지난날의 반성이고 검질기고 웅장한 기저의 움틈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깨알같은 서정의 언어의 고통이다. 

   
▲ ⓒ영화 동주

동주와 몽규

 시인 윤동주와 독립운동가 송몽규. 둘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전해오는 울림의 무게가 다르다. 동주(東柱)와 몽규(夢奎). 동녘의 기둥과 꿈과 별. 영화 ‘동주’에서 “동주가 시를 좋아하는 만큼 몽규도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라고 말하듯 둘의 이름처럼 이념과 감성이 서로를 가로지를 때 비로소 피어오르는 것이 있다. 실존과 구조의 대립,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오래된 고민은 동주와 몽규로서 해결되려한다.

 힘든 연극을 보고난 후 밀려오는 구토와 어지러움, 몸의 기관 하나하나가 떨어져 나가는듯한 감각을 기억한다. 이는 단순히 연극이라는 형식의 특성상 배우와 관객의 가까움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의 배우를 배려하고 숨 쉬는 것조차 잦아들며 주체할 수 없는 상황 속 눈이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침잠. 명사를 동사로 마주했을 때 오는 괴리감은 타인의 짓이겨짐이라는 글자에서 느껴지는 그것과 달랐다. 가치의 부재와 무의미한 신념으로 인해 경악이 사로잡는 공간. 연극은 믿어왔던 모든 체계를 무너트렸고 이 세계로부터 속았음을 알려주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지 않는 사회와 좋음만을 보려 순응하는 시선, 선택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포기된 많은 가치들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노력으로 이름 없이 채워져 갔다.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 기제와 진정 중요한 이면을 외면한 채 나눠먹는 오늘 하루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말과 술 한 잔으로 넘길 수 있다는 듯이 감각을 속인다. 허상을 마주한 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세계는 다가왔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구조적 영역의 삶으로 인해 분열된 자아는 현실 앞에서 무력해진다. 생각을 하는 것과 생각에 사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기에 이전까지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며 무너짐에 뒤덮였다.

 몽규는 말한다. “인민을 나약한 감성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그런 힘이 어떻게 모이는데 그저 세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 문학 속으로 숨는 것 밖에 더 되니?” 이제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던 과거에 비릿한 표정을 보낸다. 확신에 찬 신념과 전 인민의 해방을 외치며 달리던 몽규. 그는 공동체와 불러져야 할 이름들을 사유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란 말을 하지 않던가.

 동주는 답한다. “시도 생각을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낳는 것이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문학을 이용해서 예술을 팔아서 뭐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데 누가 그렇게 세상을 변화 시켰는데? 애국주의니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그딴 이념을 위해 모든 가치를 팔아버리는 것 그것이 관습을 타파하는 일이야?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조류에 몸을 숨기려하는 썩어빠진 관습 아니겠니?”

 첨예한 둘의 대화같이 서있는 곳이 달라졌다고 자연스러웠던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숭고와 초월, 헌신과 사랑은 그렇게 잠시 묻어둘 수 있는 것일까. 마치 실재하듯 돌아가는 이 사회에서 묵상에 빠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건네는 최초의 악수. 그 악수를 쉬이 건넬 수만 있다면 그건 아마 소시민이기를 거부하지만 자존감으로 위장한 자기기만일 것이다.

   
▲ ⓒ영화 동주

동주의 이야기

 이따금씩 우리는 불안에 뒤덮인다. 아니 차라리 휩쓸려버린다. 지금 행복하기에 느끼는 불확실성. 경이로운 것의 있음과 그로 인한 경외. 모든 의미연관이 끊어진 곳에 던져짐을 느끼고 지금 여기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누군가 옆에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두려움과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공황장애. 그저 ‘있음 그 자체’를 마주한다. 검질긴 심연은 마음속에서 요동치기만을 반복했고 무(無)속에서 나는 해체되며 어떤 사람이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어떤 감정을 가졌는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듯 매섭게 존재 경험은 존재 이유를 물었다. 대상 없이 엄습한 공포, 더 이상 매몰되어있기에는 너무 큰 불안함이 필연적으로 무엇이라도 낳게 한다. 타인에게 잊혀져가는 것보다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 존재 자신의 의미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모든 건 다가온 기분 속에서 개시된 세계가 아니었던가. 불안에 빠질 때면 흩어지기만을 바라고 순환의 일렁임에 애석하기만 했던 나는 그 언젠가 느꼈던 초월에 의지한다. 모든 것을 불식시킬 수 있는 완전함. 망각과 타성에 익숙해질 때쯤이면 침묵으로 일관했던 존재의 목소리도 불현듯 피안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것들은 다시 떠올랐고 잊은 것들이 살아난다. 서로 다른 우주에서 비대칭적으로 흐른 너와 나의 시간성, 이름 모를 소방관의 헌신, 같은 노래에 발맞추어 뛰던 사람들, 스무 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 마주했던 엄마의 쉰 셋. 이토록 몸서리치며 경험하게 하는 형이상학이었다. 의심할 수 없이 원하던 것, 하지만 가까울수록 더 커지는 파도. 전체로서의 자연, 초월과 숭고 안에서 언제나 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서 역설적으로 피어오르는 갈망과 고양감이 아니었더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순수의 벅참과 뜨거움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 ⓒ영화 동주

몽규의 이야기

 분열된 자아는 이제 개인적 차원의 심리적 기분,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전히 소중한 것들을 느끼며 일상의 중요성을 아는 의식화. 사람들 사이에 서있다는 ‘인간’(人間)과 존재의 언어가 말랑하게 느껴지는 ‘사람’ 모두에 집중하는 간극에 선다. 진리와 옳음에 부합했던 선험성에만 기대지 않고 여실히 구성되는 자기. 거시적 이념에 휩싸여 살아가기 보다는 거시가 놓친 것들을 모아 담는다. 저 하늘 위에서 이 세계를 조망하는 것이 아닌 가장 가깝고 미처 미뤄두었던 것부터의 시작. 선천성과 구성의 영역, 실존과 구조 그 사이에서 위태로움을 느끼며 경도되지도 어느 하나에 고립되지도 않을 약속이다. 감성에 지표를 달아주었던 예술가와 철학자들에 되새긴다. 덕분에 오늘을 살아가며 존재 고백의 언어를 쏟아낼 수 있다고. 계속하여 말해도 부족하지 않고 반복되어 잊지 않으려는 자기 암시는 단단해졌다고.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그로부터 구성되는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거리의 사람들과 저마다의 역사, 여전히 그 어떤 것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엄들, 전해져 오는 역사성은 선천성에 의해 이어진다. 열망은 여기 이곳의 모든 사람들을 향했을 때 새로운 얼굴을 들었고 막막함은 먹먹함으로 바뀌었다. 지나쳐가는 수많은 사람들에서 느껴지는 그들 하나하나의 이야기. 많은 것을 추스를 수 있었음에는 내면의 응시와 감응, 타자들로부터 이루어지는 이 곳, 이 세계 때문일 것이다.

 몽규의 과거로부터 현재로의 이행으로서의 통시성과 동주의 무한한 현재로서 언제라도 퍼져나갈 수 있는 공시성. 부당함에 울분을 토하며 치부를 이겨내지 못함에 한탄하던 몽규와 압도되지 않으며 자긍을 지킬 수 있었던 동주. 이들의 양상은 서로의 것들을 오가며 이해를 완성한다. 그들의 이름에서 빌려올 수 있는 환유는 이분법의 간극 아니 그 간극마저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미학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물리법칙은 발산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인 노력은 초월로 보답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의의들 혹은 덮어두었던 문제들이란 이젠 없다. 각자의 영역과 서로를 오가는 통섭, 어제보다 하루 더 늙은 오늘의 자기 초극. 순수 예술에 속았다고 여겨서 떠난 참여예술로의 이행은 이들의 접점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첨예하게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현재로부터 시작하는 과거와 미래에로의 도약. 과오는 생산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낳는 힘이 되었고 우울함을 넘어선 공허함은 지금을, 순간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다.

 노동, 인권, 여성, 소수자, 경제, 역사, 체제, 사유하는 개념들 그리고 이와 만나는 꿈, 초월, 실현, 낭만, 혁명, 실재로서 경험하는 ‘지금 여기’의 미시가 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구성하는 오래된 미래로서의 몽규와 그 언제라도 영향을 미치는 텅 빈 충만함으로서의 동주. 수많은 생각들을 머리에 이고 행할 수 있는 일상의 걸음이다. 생각을 하는 것과 생각에 사는 것은 너무나 다르기에 자기를 파괴할 수 있는 주체성을 발로한다.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이며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자기 존재가 뒤틀리는 메스꺼움을 긍정한다. 파편화된 그들의 삶을, 너무나 커 실체조차 인식할 수 없는 사실들을 불편하더라도 계속해서 입에 넣어 먹어내야 한다. 의식 없이 기대왔던 것들을, 동일자의 무의미한 반복들을 중단하고 확장하며 생산할 수 있는 시원(始原)으로서의 긍정. 제 아무리 무미건조한 이름으로서의 관념들이 반복되더라도 그 딱딱함과 지루함이 귀찮음과 짜증을 유발하더라도 덜어내진 것들을 돌이켜야 한다. 해체되고 파괴되며 다시 구성되는 나. 세계의 반조와 이 땅위의 것들을 길어냄은 지금 여기 내 주변으로부터 시작된다. 비교로서 혹은 조금 더 가짐에 위안하며 얻는 만족이 아닌 자기로부터 완수하는 미학적 윤리학 혹은 유물론적 미학. 여전히 불안하고 체계에 매몰될 때 느껴지는 무력함은 오롯하지만 위태로움 속 조그마한 확신은 이젠 교활한 체제에 부합하거나 수호하지 않으려는 의지이며 너를 향한 나의 열망이다. 작금의 현실과 도래하는 시류, 오늘의 안위. 동주와 몽규가 그러했듯 그 언젠가 우리도 무던히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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