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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영화
내가 쫓던 달빛의 이름 : <문라이트>
문희경 칼럼니스트  |  sinclair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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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6  21:4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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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리 젠킨스, 2017 / 마허샬레하쉬바즈 알리, 알렉스 R. 히버트, 에쉬튼 샌더스, 트레반테 로데스, 나오미 해리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 장면 하나. ‘블랙’이 케빈의 품에 안겨있다. 가만히, 기댄 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케빈과, 그 안에서 평안한 B의 얼굴. 청년이 된 샤이론과 케빈이 다시 만나 서로를 어루만지는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상한 얘기지만 <문라이트>는 기실 엔딩씬인 바로 이 장면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리틀’, ‘샤이론’, ‘블랙’. 세 개의 장으로 연결되지만 시종일관 듬성듬성 어딘가 비어있는 듯 했던 서사는 이야기의 끝, 그러니까 두 사람의 재회장면에 이르러서야 모종의 인과관계를 획득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점, 그러니까 한 ‘사람’으로 수렴된다. 마침내 커다란 샤이론의 어깨를 다시 감싸 안은 바로 ‘그 사람’. 이렇게 이야기를 거꾸로 세우면 영화는 재구성된다. 전체 서사가 마지막 단 한 장면을 위한 거대한 플래시백이 되는 셈이다. ‘블랙’, ‘샤이론’, ‘리틀’. 세상으로부터 세 개의 이름으로 불리던 남자는 왜 하필 스스로를 정의할 이름으로 ‘블랙’을 선택했을까.

 

 ‘흑인’이면서 ‘동성애자’인 남성의 삶을 흑인 배우가 연기하지만, <문라이트>는 사실 ‘흑인’이나 ‘동성애자’, 혹은 ‘흑인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히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때문에 나와 다른 ‘소수자’의 이야기로 상정하고 쫓아가다 보면 모든 것을 놓치고 만다. 즉, 이 영화는 배리 젠킨스가 흑인 감독으로서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을 수상한 사실이 갖는 정치적 함의와는 별개의 시각으로 감상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회가 가하는 억압과 폭력 속에서 차별받는 이들의 삶’. 배리 젠킨스 감독이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단순히 그런 존재론적 초상을 드러내는 것 너머에 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있다. 영화 속의 ‘지극히 보편적이지 못한’ 한 존재의 이야기가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이나 동성애자의 삶, 빈민가 출신 이민자의 삶도 아닌 ‘인간’ 삶의 ‘보편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꼬마 샤이론이 여러 관계맺음 속에서 상처입고 성장하며 스스로를 정의해나가는 과정은, 그처럼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나 거친 갱(Gang) 문화 따위를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보는 이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혹자의 평처럼 이 영화를 감상하며 조심해야 할 것이 ‘감동과 연민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의 겉껍데기를 둘러싼 ‘흑인’, ‘동성애자’라는 소재 안에 갇히면 이 작품이 전하려는 감동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배리 젠킨스는 <문라이트>를 통해 흔히 ‘소수자’로 정의되는, 사회적으로 특별하거나 특수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인식되는 이들의 삶이, 실은 얼마나 놀랍도록 ‘보편적인’ 인간의 삶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가 매우 자연스럽게, 또 우아하게 전달될 수 있는 건 그의 세련된 연출방식 덕분이다. <문라이트>는 대사가 많지 않다. 당연한 결과로 인물을 둘러싼 여러 관계와 사건들 사이의 인과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극영화의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이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전체 줄거리와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가로막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나 소수자를 다룬 내용의 ‘마이너’한 영화라면 이런 불친절함이 관객에게 주는 불편함은 더욱 커진다. 흔한 표현으로 ‘난해한 영화’라는 딱지가 따라붙는 이유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아직 내가 아카데미의 감성을 쫓아가기에는 먼 것 같다”고 말한 어느 관객의 별점평이 높은 추천수를 받은 것도 아마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대사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채운 것들이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보면 영화 속에서 내가 따라가야 할 방향이 어딘지가 조금은 분명해진다.

 

 우선 <문라이트>는 카메라 혹은 감독이 관찰자적 입장에서 흑인 소년의 삶을 담아낸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 스스로 화자가 되어 자신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일종의 회고록 같은 것 말이다. 자연히 샤이론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될 수밖에 없다. 전체 서사가 결국 세 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샤이론의 ‘기억’이미지들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줄거리의 군데군데 마다 뚝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그래서다. 이는 우리가 평소 기억에 의존해 과거의 일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된다. 모든 기억 활동은 그 순간의 ‘감정’을 재현하는 작업이다. 지난 시간을 회상할 때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한복판에서 내가 감내해야했던 감정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 축적된 시간은 명확한 맥락을 갖춘 역사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날카로운 편린들의 집합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그러한 맥락들을 풍부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대사를 최소화하고 비언어적 요소들로 상황과 관계들을 ‘묘사’하는 내러티브 방식은 탁월하다. 캐릭터의 감정 능선을 타고 흐르는 바이올린 테마곡, 미세하게 인물과 인물 사이를 채우는 숨소리, 해변의 바람결까지 담고 있는 색감, 보는 이를 시리게 만들만큼 일렁이는 ‘눈빛’…. 특히 어딘가 자신 없는 듯한, 대상을 또렷이 바라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샤이론 특유의 시선 처리를 그대로 옮긴 카메라의 포커싱(Focusing) 기법은 압권이다. 화면의 흔들림 하나 만으로 샤이론이 케빈을 대하는 감정, 어머니와 후안을 대하는 감정, 패거리들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절망감까지 표현해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요소들의 조합이 놀랍게도 대사보다 더 많은 몫의 말을 화면 밖으로 쏟아낸다.

 

 이제 이 영화가 ‘말’하는 방법을 좀 알았으니, 다시 문제의 장면으로 돌아오자. 새로운 사건이 시작될 것만 같은 시점에 우리를 허탈한 암전으로 밀어 넣은 그 재회씬 말이다. 상식의 선에서 생각해볼 때 자신의 삶을 바꿔버린 케빈을 다시 만나러 가는 ‘블랙’의 선택은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 날’로부터 10여년을 도망쳐 건져낸 삶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왜 마이애미로 갔을까. 우리 모두가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며 한 번쯤 해봤던 실수이기 때문인지, 그의 호기심은 어딘가 미련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장면을 단순히 잊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향수라고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텁텁한 물음을 나름대로 해소할 수 있게 하는 단서가 바로 영화 마지막 장의 제목, ‘블랙’이다. 모든 것을 감수하고 자신만의 복수를 감행한 샤이론은 스스로를 지킬 방법으로 ‘강해지는 것’을 택한다. 몸을 키우고 힘을 길러서 세상으로부터 게이이자 가난한 흑인쯤으로만 취급받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겠다는 것. 그러나 입지 있는 마약 거래 관리인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에서는 어쩐지 곳곳에서 ‘후안’을 모방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고, 그토록 바라던 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악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약중독자였던 어머니와 재활치료센터에서 나누는 대화는 그러한 상황을 함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넌 누구야?(Who is you?)”. 바로 이러한 때 다시 만난 케빈의 입을 통해 던져지는 대사는 모두를 이야기의 첫 장으로 돌려보낸다. ‘누구나 언젠가는 스스로가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와. 그 선택을 다른 사람이 하도록 놔두지 마.’ 인간이라면 탄생의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따라붙는, 원죄와도 같은 그 질문이 다시 화면을 가득 메운다. 살아남는다는 것, 강해진다는 것, ‘나’를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의 입으로 ‘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다던 10년의 세월은 ‘너답지 않다’는 케빈의 한마디 말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잔뜩 벌크업된 팔로 자동차 핸들을 돌려가며 자신감 넘쳤던 눈빛마저 어느 새 상처 입은 ‘리틀’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다. 스크린 밖의 관찰자는 당혹감에 빠진다. 화면 속의 남자는 누구인가? 샤이론인가? 아니면 ‘후안’을 흉내 낸 그 누구인가? 청년 ‘블랙’은 정말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만일 10년 전의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오늘의 나를 회의하는 물음을 던진다면? 나는 나를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샤이론은 사실상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가 던지는 뼈아픈 물음에도 화내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가슴을 때리는 것은 바로 다음 장면이다. ‘나는 나일뿐’이라고 대답한 뒤 느릿하게 내뱉는, 수줍은 문장. ‘너와의 첫 키스 이후 나를 만져준 사람은 없었다’는 그 고백 말이다. 마치 입고 있던 두터운 외투를 현관 앞에 벗어내듯, 그는 너무도 쉽게 지난 10년간 감춰온 자신의 속살을 드러낸다. 그러자 ‘케빈’은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사랑 하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애초 삶이란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과정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 무엇도 되어버리지 않도록’ 그럴듯한 보호색을 갈아입는 과정이라는 것을. 때문에 내가 누군가에게 임의로 설정해둔 ‘그 다움’이란 것이 사실상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질적인 껍데기 밖으로 진짜 자신을 꺼내놓는 ‘블랙’을 보면서 케빈은 이해한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포옹 장면은 그러한 안도감과, (아마도 그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불안정함을 교차시키며 영화의 마침표가 된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간의 서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야차같은 세계에서 ‘나’를 정의하는 작업은 결코 끝나지 않는 투쟁이다. 몇 겹의 철갑을 둘러가며 방어해도 매우 사소한 계기 하나로 우리는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 버리곤 한다. 미치도록 잊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의 나락. 마치 언제나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져 버리는 시지포스의 바위처럼, 먼 시간을 도망쳐 나와도 나의 오늘은 늘 ‘그 날’의 꼭짓점으로 이어져있는 셈이다. 그럴 때 마다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 그의 이름은 첫사랑일수도 있고, 우상일수도 있고, 친구 혹은 배신자일수도 있다. 언제든지 블랙홀처럼 내 과거의 시간들을 자신으로 요약해버리는 누군가를 우리 모두는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이끌리듯 그가 집어삼킨 시간 속으로 빨려들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분간할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이 과거의 시간을 총집합한 존재인지, 아니면 과거의 그 무엇이 내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욱 집요하게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급속도로 기울고, 또 차오르는 달처럼 그의 얼굴이 변한다. 넘어서고 싶은 ‘장애’였다가, 돌이켜 용서를 구하고 싶은 ‘죄책감’이었다가, 언젠가 꼭 망가뜨려버리고 싶은 ‘증오’였다가. 마지막으로 변하는 얼굴의 모습은 대체로 ‘슬픔’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슬픔은 과연 누구를 향하는 슬픔인걸까?

 

 이 질문 앞에서 ‘블랙’은 용감하게도 자신의 달을 찾아가 만난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만남의 순간에서 끝나버렸다. 왜일까. 감독 역시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어야만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남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현실에서 목격해야하는 달빛은 보정된 화면 속의 그것보다 퍽 미약하고 어두운 데다, 생각만큼 자비롭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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