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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음악
끝나지 않은 노래. 메르세데스 소사, 대지의 목소리
문희경 칼럼니스트  |  sinclair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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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31  1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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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rcedes Sosa, 1935~2009, Argentina ⓒAnnemarie Heinrich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 15일간의 올림픽이 끝났다.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휴양지 ‘이파네마 해변’. 브라질이 낳은 보사노바의 거장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은 이파네마를 사랑한 나머지 세기의 명곡 ‘이파네마의 처녀(Girl from Ipanema)’를 세상에 내놓는다. 언젠가 조빙의 음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 우연히 발견한 웹페이지에서 대략 이런 식의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포르투갈어(특히 브라질계 포르투갈어)는 시(詩)문학에 최적화되어 있는, 가장 시적인 언어다”. 보사노바 곡들의 가사가 번역을 거쳐서도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그래서일 것이라고. 그 글귀를 읽었던 곳이 어디였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 후로 나는 이전까지 단순히 보컬과 멜로디에 이끌려 들었던 보사노바와 브라질풍 재즈곡들의 가사(대체로는 영어로 번역되어 있는 가사)를 다시금 찾아보려 노력한다. 비록 포르투갈어를 배워본 적이 없는 탓에 원어 그대로의 시구들이 주는 절절함까지는 느끼지 못할지라도.

 

 국가 간의 유대가 강한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는 배다른 형제와 같지 않을까. 완전히 별개의 언어라기보다는, 모종의 정서적 연결고리를 가진 다르고도 비슷한 언어. 이를테면 전라도 사투리와 제주도 사투리 정도의 차이랄까. 브라질에서 쓰이는 포르투갈어를 오리지널 포르투갈어와 따로 떼어 ‘브라질식’ 포르투갈어, 라고 분류하는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수많은 세대에 걸쳐 공통적으로 체화한 ‘한(恨)’의 정서. 긴 세월 이어진 식민지배로 인디오와 메스티소, 크리올 등 복잡해진 인종구성과 이들 간의 계층갈등, 19세기 불완전한 독립을 거쳐 20세기 전반을 휩쓴 혁명들과, 각국에서 벌어진 군부의 잔혹한 독재정치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근현대사는 어쩐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현시대 우리와 곁을 같이 하는 미국, 중국, 일본과는 멀리 떨어진 제3세계 나라들이지만, 이들의 음악을 듣고 있을 때 그 가사의 뜻을 몰라도 어딘가 친숙한 정서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1. 라틴 아메리카의 현대사를 노래한 여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대한민국을 뒤덮었던 70~80년대, ‘상록수’와 ‘아침이슬’이 그 시대의 정신을 대변했듯 20세기 아르헨티나,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을 대변하는 가수가 있었다.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1935년 아르헨티나 투쿠만(San Miguel de Tucuman)지역에서 독립기념일(7월 9일)에 태어난 소사는 자신의 생일이 가리키던 운명처럼 평생의 음악인생을 독재와 가난으로 고통 받던 민중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데 바쳤다. 열다섯 살이 되던 1950년 한 라디오 방송이 주최한 가요제에서 입상하며 음악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기반으로 브라질, 칠레, 쿠바 출신의 다양한 음악가들과 협업을 이어간다.

 

 외국 거대자본의 유입과 각종 민영화 정책에 잠식되어 극심해진 양극화와 곳곳에서 난립하는 군사정부의 탄압정치로 대다수 남미의 민중들이 시름하던 1960년대 후반, 소사는 아타왈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 빅토르 하라(Victor Jara)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새로운 노래운동(Nueva Cancion, 누에바 칸시온)'을 개척하며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저항정신을 퍼트리는 상징적인 인사가 된다. 그러나 1976년 '호르헤 비델라(Jorge Videla)'의 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아르헨티나에도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1973년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을 살해하고 집권한 칠레의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정권이 아옌데의 측근이었던 '빅토르 하라',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등의 문화계인사들을 살해, 고문하거나 추방하는 등의 탄압을 이어가면서 그들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민중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소사 역시 정부의 감시망에 쫓겨야하는 처지가 된다.

 

 계속되던 검열과 살해위협에 시달리며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는 결국 1979년 라 플라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관객들과 함께 체포되고, 망명길에 오른다. 이후 약 4년간 스페인과 프랑스를 오가며 망명생활을 하고 198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비델라 정권이 퇴각할 위기에 놓이자 비로소 아르헨티나로 돌아오게 된다. 아직 그녀를 노리는 위험이 채 가시지 않은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 열린 귀국 콘서트에서 소사는 청중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한 곡의 노래를 부른다. 칠레의 저항시인이자 칠레 민속음악의 어머니였던 비올레타 파라(Violeta Parra) 원곡의, '삶에 감사합니다(Gracias a La Vida)'. 10년 전이었던 1971년 발매한 트리뷰트 앨범에서 이미 파라의 헌정곡으로 실렸던 이 곡은 이 공연을 기점으로 다시금 소사를 대표하는 노래로 사랑받게 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며칠간 소사와 그녀의 동료들이 함께 오른 이 콘서트는 “메르세데스 소사 인 아르헨티나(Mercedes Sosa en Argentine)"라는 이름의 레코딩 앨범으로 발매되고,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1982년 귀국 이후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건강상태가 부쩍 나빠지기 시작하지만, 2009년 복합성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미국과 유럽등지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안데스 음악에서 출발한 그녀의 음악세계는 40여 년간의 활동기간동안 다양한 뮤지션과 장르를 만나며 풍부한 음악적 발전을 이룬다.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ez),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와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스팅(Sting), 샤키라(Shakira) 등 포크, 오페라, 팝과 록을 넘나드는 다양한 장르와의 협업은 물론, 자신과 동시대 활동한 가수들 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젊은 세대의 가수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던 소사의 음악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사운드로 그녀가 작고한지 7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2. 알폰시나와 바다(Alfonsina y El Mar)

 

 메르세데스 소사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한 곡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1969년 아르헨티나가 낳은 최강의 예술 콤비 ‘아리엘 라미레즈(Ariel Ramirez)’와 ‘펠릭스 루나(Felix Luna)', 그리고 소사가 만나 작업한 전설의 음반 “아르헨티나의 처녀들(Mujeres Argentinas)"의 수록곡 중 한 곡을 소개할까 한다.

 1969년 발매된 이 앨범은 제목 그대로 아르헨티나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통 클래식을 공부해 아르헨티나 음악의 예술적 수준을 끌어올린 작곡가 ‘아리엘 라미레즈’, 그리고 아름다운 시구들로 라미레즈의 음악을 훌륭한 가곡으로 승화시킨 시인 겸 작사가 ‘펠릭스 루나’. 두 사람의 만남은 당시 33세의 신예 가수였던 소사 특유의 울림 있는 목소리와 만나 오랜 세월 사랑받는 명곡들을 탄생시켰다. 수록된 노래는 총 8곡으로 각각 아르헨티나의 현대사에 나름의 족적을 남긴 8명의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 다섯 번째 곡인 ‘알폰시나와 바다(Alfonsina y El Mar)’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활동했던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Alfonsina Storni)’의 이야기를 다룬 노래다.

 

   
▲ Alfonsina Storni, 1892~1938, Mar del Plata

 

 시골출신의 여교사였던 스토르니. 불행한 결혼생활로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란 그녀는 일찍부터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드러내는 시들을 쓰며 자신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20대 초반, 시골의 작은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녀는 마을의 작은 독서모임에 참여하면서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유부남의 아이를 갖게 된 뒤 더 이상 교사 일을 이어갈 수 없었던 스토르니는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이주하는데, 이곳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남성 엘리트 중심의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시풍이 유행하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본능적이고, 직설적이며 원초적인 시를 쓰던 스토르니는 남성 문인들에게 언제나 조롱거리였고, 그녀의 시는 시대에 뒤처진 저열한 연애시로 치부된다. 무엇보다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터부시되던 시대에 여성화자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말하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비판하는 여성문학의 등장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쉽사리 용납되기 힘든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초주의의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시, 소설과 희곡을 쓰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이어갔던 스토르니는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 등장하는 라틴 아메리카 페미니즘 문학의 초석을 다진 작가로 인정받게 된다. 40대 초반 암 선고를 받은 뒤 7년 동안 투병생활을 했던 그녀는 1938년 휴양도시 마르 델 플라타의 해변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는데, ‘알폰시나와 바다’는 바로 그 마르 델 플라타의 바닷가에 스토르니가 몸을 던지던 순간을 그리고 있는 곡이다. 평생을 미혼모, 삼류 문학 작가 등 자신을 향한 편견들과 맞서 싸우며 ‘여성’에 대해 노래했던 시인 알폰시나 스토르니. 갖은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민중을 위해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소사의 목소리로 읊는 펠릭스 루나의 추도시는 어쩐지 그 자체로 험난하고 숙연했던 20세기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듣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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