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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길을 잃어도 괜찮아
이준건 칼럼니스트  |  dlwnsrjs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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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10.17  22: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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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문득 길을 잃고 싶다면

[디아티스매거진=이준건] 어린 시절에는 길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낯선 곳에 혼자 남겨져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그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불쾌했고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그 불안함이 싫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생기고 서울 지리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걱정과 불쾌한 감정들은 겪어본지 꽤 오래된 것들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길을 잃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릴 때에 비하면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요즘은 길을 잃으면 조금 신날 때가 있다. 쳇바퀴처럼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삶에 약간의 일탈이랄까. 언젠가는 길을 찾게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어디로 가는 게 정답인지 모르는 상태. 항상 답이 예정돼 있는 일상에서 가끔은 그렇게, 답을 모르는 상태에 빠지는 것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 사람들이 북적이고 길이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어 정신줄을 놓고 걷다 보면 길을 잃기 마련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ㅡ'길을 잃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종로의 숭인동 동묘시장을 권하고 싶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그 당혹감, 그러나 결국에는 답을 찾으리라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마음껏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묘앞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위치해 있어 찾아가기도 어렵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가용을 타고 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일단 동묘시장 자체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편이고, 기껏 길을 잃어버리려고 와서 자가용을 타고 왔다갔다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른에겐 잊어버린 기억을, 아이에겐 잊지못할 기억을

모든 시장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동묘시장이 갖고 있는 장점은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물품들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2~30년 전에 유행했었던 골동품들이다. 축음기부터 타자기, 오래된 라디오, LP판, 만년필과 판매중지된 라디오까지. 작년에 이곳에 들렀을 때 타자기를 구입했었는데, 타자기로 타자하는 것은 확실히 펜으로 필기하거나 노트북으로 메모하는 느낌과는 달랐다. 특히 부드러우면서 딱딱해 보이는 타자기 특유의 글씨체는 인쇄본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인상을 준다. 동묘시장의 골동품은 대체로 이런 느낌이 아닐지. 공산품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조금 다른 느낌의 물품들.

   
▲ 아직도 레코드판을 팔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 과연 전화기가 작동할지, 보장은 못하지만...

 

 

   
▲ TV가 진화한 역사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으니 사뭇 박물관처럼도 느껴진다.

중고, 좀 더 느낌을 살려 말하자면 '구제'들은 동묘시장을 풍성하게 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동묘 앞에 거나하게 펼쳐진 구제의류도 볼 만하지만, 골목 안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중고 책방이야말로 압권이다. 2000년대 초반 중고생의 마음을 들쑤셨던 '인소(인터넷소설)'들은 물론, 지금은 절판돼 구할 수 없는 각종 옛날 서적들, 한문 고서들, 영문 서적과 오래된 논문 등이 어지럽게 산재해 있다. 원하는 건 찾기 어려워도 그저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훌쩍 지나간다. 게다가 가격은 얼마나 저렴한지, 만 원이면 3권 정도는 구매하기 충분하다.

 

   
▲ 열심히 찾다 보면 의외로 좋은 옷을 얻을 수도.

 

 

   
▲ 물론 중고인 듯 중고 아닌 옷들도 있다.

 

 

   
▲ 동묘시장 중고책방을 결코 우습게 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게다가 이곳은 서울에서 얼마 남지 않은, '흥정이 통하는 시장'으로 유명하다. 모든 가게가 그런 건 아니지만, 골동품들로 매몰된(?) 가게에서는 가격이 제멋대로다. 물론 그 제멋대로는 엿장수의 마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조금만 아양을 떨며 말하면 몇 천 원 정도는 어렵지 않게 깎을 수 있다. 그렇게 악착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여유가 넘치지도 않는, '서울의 인심'을 간직한 장소가 바로 동묘시장이다.

 

따라서 동묘시장은 아이들과 함께 오기에도 좋은 곳이라 추천할 만하다. 중고 물품을 구입하며 아껴 쓰고 바꿔 쓰는 마음을 기를 수 있는가하면, 직접 흥정에 참여함으로써 타협하는 능력을 키울 수도 있다. 부모님과 '함께' 길을 잃으며 도심에서 스스로 출구를 찾아나가는 방법을 깨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동묘시장이다. 구태여 그런 재미를 원치 않더라도, 뜨끈한 오뎅 국물이나 느끼한 녹두빈대떡의 맛을 보여주고 싶다면(혹은 당신이 먹고 싶다면) 한번쯤 올 만한 곳이다. 사람들이 넘치면 피곤하고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라지만, 이곳은 사람이 많을수록 더 재미있고 볼거리가 풍성해진다. 그러니 이번 주말, 사람들이 북적여도 즐거운 동묘시장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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